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작전 경과 (문단 편집) === 제1적기군의 공격(8.9~8.11) === 수이펜호 북쪽부터 한카 호수는 울퉁불퉁한 산악 지대였다. 한카 서쪽에서부터 40킬로미터는 개활지였지만 습지와 개울이 많았다. 더 서쪽으로는 가라 프라파스치라 불리는 고지대가 있었다. 가라 프라파스치 서쪽에서 8킬로미터 가면 파그라니치늬 고원이 있었는데 빽뺵한 삼림으로 뒤덮혀 있었다. 여기서 남쪽으로가면 무단장과 왕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메레츠코프 원수는 이 고지대를 돌파하는 임무를 벨로보로도프상장의 제1적기군에 맡겼다. 제1적기군은 이곳을 돌파함과 동시에 양 옆의 제5군과 제35군의 공세를 지원하게 되었다. 벨로보로도프는 이 지대가 기갑 전력을 통과시키기에는 무척 어려운 곳이라고 판단했다. 메레츠코프는 7월 8일에 제1적기군에 파미엔퉁 서쪽을 거쳐 돌파하면 제5군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벨로보로도프의 군대는 작전 개시 3일동안 30킬로미터의 종심을 주파해야 했고 산들과 타이가라 부르는 북극권 삼림지대를 돌파해야 했다. 작전 개시 8일에 제1적기군은 팜미엔퉁과 린커우 시를 짐령해야 했다. 그 후에 제1적기군은 무단 강에 도달해 무단장측면으로 진격해 제5군과 협격하여 무단장을 포위한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동시에 제1적기군의 우익은 북쪽인 칸카 호수 서안으로 치고들어가 일본군의 밀산 요새 지대를 박살내고 제35군의돌입을 도와줄 것이었다. 그 관계로 제1적기군은 8일 동안 150에서 180킬로미터를 진군해야 했고 하루당 진군속도를 평균 8에서 10킬로미터로 맞춰야했다. 제일 위험한 부분은 첫날에 8에서 20킬로미터의 삼림을뚫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 삼림지대는 2명도 통과하기 어렵다고 마음 놓고 있었지만 벨로보드로프는 이 삼림지대로 6개 소총병사단과, 포병사단, 400대가 넘는 전차와 자주포, 돌격포들, 1개 중야포여단과 2개 전투공병여단, 그리고 천여 대의 모터사이클을 통과시킬 것이었다. 메레츠코프와 벨로보드로프는이 지역은 통과하기 어려운 만큼 일본군의 방어도 허술할 것을예상하고 있었다. 이곳의 일본군은 제126사단으로 노미조 카즈히코 중장이 지휘하고 있으며 팜미엔퉁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이 사단은 80에서 100킬로미터의 종심을 두고 120킬로미터의 국경을 방어해야 했다. 126사단의 최전방 방어선은 2개의 축선으로 되어있었는데 하나는 핑양 시를 지키는 것이었다. 남쪽의 밀산에는 제135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135사단은 핑양과 팜미엔퉁이 뚫릴때를 대비한 제2방어선을 전개하고 있었다. 제135사단의 방어정면은 40킬로미터로 칭쿠링먀오에서 주몬지 교차로를 방어하고 있었다. 주요 방어 지역은 상치툰, 판치에호, 난샨, 그리고 흐샤오루타이였고 모두 2대 대대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어야 했지만 계속되어병력이 빠져나가 중대 규모의 1개 소대씩밖에 주둔하지 못했다.여기의 일본군의 임무는 핑양을 방어하여 소련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벌이고 본대의 지원을 기다리며 지키는 것이었다. 흐샤오루타이의 주둔군의 경우 최후의 1인까지 위치를 사수하란 명령이 있었다. 팜미엔퉁 지역의 일본군 병력은 돌파당할 경우 적지에서 유격전을 벌이게 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팜미엔퉁과 리슈첸 라인에 제3방어선을 설정해 놓았는데 이 라인은 물렝강을 중심으로 그려졌고 위험시 물렝 강의다리들을 파괴할 계획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제126,124, 135사단은 강을 건너 후퇴할 것이었다. 벨로보로도프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이 험지를 어떻게 통과하고 통과한 이후에도 어떻게 보급선과 통신선을 유지할 것인가였다. 그래서 벨로보로도프는숲에서 겨우 개척한 오솔길을 일렬 종대로 통과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비좁은 단선 도로를 지나고 있을 때 숨어 있던 일본군이공격을 하다가 전차가 길 위에서 한대라도 주저앉기만 하면 끔찍한 수준의 교통정체가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 위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전차 위에는 항상 전투공병들이 탑승하여 전차를 보호하고 길을 개척해야 했다. 7월 12일에 벨로보로도프는 제1극동 전선군 사령부를 찾아 메레츠코프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메레츠코프는 2개의 진격로마다 3개 소총병사단이 통과할수 있다 말했지만 벨로보로도프는 1개의 진격로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고 메레츠코프를 설득했다. 메레츠코프는 벨로보로도프의 계획을 승인했다. 7월 24일, 제1적기군이 집결 장소에 모두 모인지 이틀 후, 벨로보로도프는 병사들에게 공격 게획을 설명했다. 군의 우익에서칸카 호수부터 파그라니치늬 고원을 넘어 밀산 요새화 지대로 진격할 부대는 제112국경수비대와 제6국경수비대가 될 것이며 밀산 요새 지대에서 반격을 위해 나오는 일본군을 차단할 것이었다. 더 서쪽의 핑양 요새지대 공략에는 제59소총병군단 예하 제397소총병연대가 투입될 것이었다. 벨로보로도프의 부관인 막시모프 소장이 제1적기군의 우익 부대를 통합 지휘하며 2개 돌격포 연대와 제60대전차여단을 지원받을 것이었다. 제1적기군의 주공은 군의 좌익에서 진행될 것이었다. 이 좁은 지대에 A.В. 스크보로초프 중장의 제26소총병군단과 A. С. 크세노폰토프 중장의 제59소총병군단이 각각 2개 소총병사단을 1파로 내세워 일본군 방어선에 구멍을 내고 팜미엔퉁과 리수첸으로 진격해 철도망과 통신망을 끊고 점령한 뒤 물렝 강으로 진격할 것이었다. 그 이후 2개 군단은 링커우와 무단장 북쪽으로 향하는 진격로로 갈라져 무단장을 향해 공격을 퍼부울 것이었다. 첫 계획이 이렇게 발표되자 벨로보로도프는 이 작전을 어떻게 지원할 것이냐에 대해 관심을 돌렸다. 포격 지원은 지형상의 난점으로 매우 힘들었다. 야포를 이곳으로 나르려면 인력이 잔뜩 동원되어야 했다. 벨로보로도프는 이 지대에서 선제 포격을 동원한 일본군 제압은 매우 힘들 걸로 파악했다. 다행히도 제9항공군이 대대적인 지원에 들어갔고 의외로 소련 포병들이 근성을 발휘해 제1적기군의 야포들은 그 지대에서 50퍼센트의 가동률을 보이게 됐다. 이 지역을 안정적인 속도로 통과하기 위해서 제1극동 전선군 사령부는 제1적기군에 1개 독립전차여단과 1개 독립돌격포연대를 지원했다. 제1적기군은 그리하여 3개 전차여단과 3개 돌격포연대, 그리고 1개 중전차연대를 가지게 되었고 각 사단당 1개 돌격포대대를 추가로 지원받았다. 벨로보로도프는 2개 전차여단과 1개 중돌격포 연대를 공병 지원하에 선봉에 내세워 험지 통과 이후 선견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제1극동 전선군 사령부는 추가적인 공병들을 제1적기군에 지원했다. 벨로보로도프의 명령에 따라 각 군단은 2개 사단을 제1파로 세우고 1개 사단을 제2파로 세웠다. 전차와 돌격포는 제1파에 중점적으로 배치되었다. 제1파의 소총병사단들은 공병들을 통해 2~3개의 진격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K. Г. 체레바노프 소장의 제300소총병사단이 이 임무의 선봉에 서서 대대적인 진격로 개척에 나섰다. 8월 8일 저녁 1800시, 제300소총병사단이 진격로 개척을 마친 차에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령관들 몇몇이 진격로를 밝히기 위해 탐조등을 사용하자고 건의했지만 벨로보로도포는 그럼 야습 효과를 크게 떨어트릴 것이라며 탐조등 사용을 금지했다. 되려 벨로보로도프는 장맛비와 천둥소리가 야습을 숨겨줄 것이라며 좋아했다. 8월 9일 0110시, 제1적기군의 제1파가 숲 지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제300소총병사단 지역에서 2개 종대로 진격하던 소련군은 최대한의 침묵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모든 전차와 돌격포, 차량에는 수풀로 덮은 위장막이 덮였다. 공병들은 후속하는 부대들이 오기 편하도록 길을 개척하느라 애를 썼다. 비로 생긴 진창과 뻘밭에 고생하면서도, 제300소총병사단의 장병들은 계획된 시간 아래 조용히 숲을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숲을 통과한 300사단의 연대급 부대들은 치우피커우의 일본군 초소를 발견했다. 제1051소총병연대가 이 지역의 초소들을 기습해 장악하고 후속 부대들은 서쪽의 시투호 강으로 진격했다. 그날이 끝나갈 때 제1051소총병연대는 시토우호와 남서쪽의 748고지를 확보하고 제1049소총병연대는 티에르시이하오 산을 오르고 나머지 2개 대대는 시토우호 강을 건넜다. 제1049연대의 제3 대대는 파닌 중령이 이끌고 있었는데 연대 포병들이 강을 건너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두 연대는 첫날에 5킬로미터를 뚫고 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없어도 이 험지를 통과하는 것은 정말 힘들고 지겨운 행군이었다. 대비를 했는데도 계속 문제가 발생하자 사단장 체레파노프는 휘하 대대들에 길을 더 넓히고 통신선을 더 확실히 하라고 명령했다. 8월 10일 아침에, 사단의 선견대인 제277전차여단이 시투호강 서안에 도달해 팜미엔퉁으로 돌진할 준비를 했다. 그 무렵, 제126사단 참모장인 다나카 마사시 대좌는 소련군의 공습과 무선통신망의 마비를 보고하고 있었다. 판치에호의 일본 주둔군 사령부는 제126사단으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됐음을 알아차렸다. 사단 정보장교는 한밤중에 일어나 소련군 폭격기들의 프로펠러 소리를 들었다. 조금 후에 핑양과 팜미엔퉁 지대는 대대적인 폭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 제277연대 소속 제1대대는 소련군 폭격기들이 구축한 바리케이드와 후퇴한 다리를 다 부셔놓는 것을 보고 망연자실해 했다. 8월 9일 1000시에 리샨에 주둔한 일본군은 치우피커우에 주둔한 대대 병력이 12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는 보고를 들어야 했다. 이 대대적인 항공 공격은 소련 지상군이 그곳에 도달하지도 않았음에도 소련군이 이미 주요 지역들을 점령했다는 괴소문을 퍼지게 만들었다. 보고를 들은 제5군 사령부는 제126사단에 제31독립대전차대대와 제20중포대대를 증원했다. 증원된 병력을 인솔하기 위해 126사단장이 차를 타고 직접 팜미엔퉁으로 향했다. 8월 9일 저녁에 제126사단 사령부는 치웅산으로 보낸 정찰대와의 통신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고 헤일링산 또한 마찬가지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날 밤에 소련군 병력들이 판치에호 동쪽으로부터 진격해 들어왔다. 계속되는 사태에 질려 있던 일본군 지휘관들은 이 병력을 1개 사단 병력으로 과대평가했다.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한 사단장은 핑양첸으로 후퇴할 것을 결정했다. 핑양첸에서 집결하는 대신에 일본군은 판치에호와 흐샤오루타이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핑양첸 서쪽에서 막아내기로 결정했다. 8월 9일 저녁 팜미엔퉁 지역의 일본 주둔군은 칭쿠링먀오와 리샨의 일본군이 동쪽과 남동쪽에서 소련군의 공세에 직면하였다는 보고를 들었다. 일본군이 소련군의 공세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소련군 제300소총병사단은 시터호강에 도달해 있었다. 공세의 우익에서는 제22소총병사단이 느리게 칭쿠링먀오를 압박하고 있었다. 더 동쪽에서는 제59소총병군단이 핑양 방어지구 중심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8월 10일 0500시에 제1049소총병연대와 1051소총병연대는 시터호 강에 도하점을 마련하고 남아 있는 8에서 10킬로미터의 숲을 돌파하며 팜미엔퉁의 개활지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아직 제 위치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다. 진격을 서두르기 위해서 사단 선견대인 Г. С. 아니쉬치크 중령의 제257전차여단은 선봉에 서서 일본군 특화점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 임무를 지원하기 위해서 벨로보로도프는 여단에 25대의 전차와 1개 공병소대, 1개 기관총 중대를 지원했다. 아침 동안, 증강된 제257전차여단은 서쪽으로 진격해 748.8고지 북쪽으로 들어가 리앙츠 호로 통하는 계곡에 들어섰고 팜미엔퉁으로 향해 북서쪽으로 달렸다. 제1052소총병연대는 리샨의 일본군 요새들을 제압했다. 북쪽에서 제1049소총병연대는 서쪽으로 진격해 시터호 계곡에 도달했고 제22소총병사단도 더 서쪽으로 진격했다. 소련군은 일본군 막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불이 숲에 옮겨붙으며 잠깐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어쨌든 계속된 진격의 결과 소련군은 전차포의 지원 아래 이 지역 일본군의 측면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이곳의 일본군 지휘관인 카와카미 [[소위]]는 그의 소대를 북서쪽으로 철수시켰다. 같은 시간에 제1051소총병연대는 리샨에서 일본군의 증강된 1개 중대를 상대하고 있었다. 소련군의 첫번째 공격으로 리샨의 일본 주둔군은 포위되었고 엄청난 포격이 리샨에 쏟아졌다. 그날 오후, 제1051소총병연대는 리샨을 점령했다. 그날 저녁에 이곳의 대부분의 일본군이 최후를 맞았고 소련군은 이 험지를 점령했다. 8월 10일 내내 칭쿠링먀오의 일본군 중대는 험한 지형을 이용해 소련군 제22소총병사단의 공세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소련군에 제1049소총병연대가 증원되었고 일본군은 남쪽으로 후퇴했다. 후퇴한 일본군은 겨우겨우 팜미엔퉁에 도착했고 흩어졌던 14명의 병사들이 합류했다. 그동안 증강된 제257전차여단은 팜미엔퉁으로 진격했다. 1600시에 팜미엔퉁 북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전차여단은 일본군 제277연대 소속의 2개 중대와 맞닥뜨렸다. 대전차 무기가 없던 일본군은 소련 전차여단을 상대로 육탄공격을 시도했지만 전혀 큰 피해를 입힐 수가 없었다. 제257전차여단은 제78급강하폭격기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급강하 폭격기들이 일본군 포병들을 삽시간에 제거하자 소련 포병들은 마음 놓고 방열하며 일본군에게 포화를 날렸다. 8월 10일 2000시에 제300소총병사단과 제22소총병사단은 제257전차여단을 후속하며 쏟아져나왔다. 소련군은 3개 축선에서 일본군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서쪽으로 밀려나며 쯔싱툰 방어선으로 퇴각했다. 일본군에게 압박을 가하던 소련군 부대들은 2100시에 도시 북쪽 방어선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박살내고 물렝 강의 다리와 기차역을 점령하며 팜미엔퉁 북쪽을 확보했다. 8월 11일 이른 아침에, 도시 남쪽과 동쪽의 방어선 또한 붕괴되었다. 오후에 일본군 주둔병들은 완전히 붕괴되고 400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일본군은 기껏해야 전차 2대를 주저앉히고 7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8월 11일 아침에, 팜미엔팅을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벨로보로도프는 제257여단에 도시 점령을 끝내고 곧장 서쪽으로 진격해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제26소총병군단과 같은 성공이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제257전차여단이 제26소총병군단의 선두에서 돌진할 때, 제59소총병군단의 선견대인 제75전차여단도 리수첸와 링커우를 돌파하고 점령했다. 제1적기군의 우익인 막시모프 중장의 임시편성 부대도 칸카 호수의 일본군 방어 병력을 박살내고 밀산 요새 지대를 남쪽에서 위협하기 시작했다. 다른 소련군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1적기군 병력도 험한 지형에서의 난점을 해결하며 돌파에 성공했고, 설마 그곳으로 쳐들어오기는 힘들 것이란 관동군의 예상을 철저히 짓밟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